칠천량해전공원에서 느끼는 1만 조선 수군의 비애
임진왜란 때 패배의 기미가 짙어지자, 왜군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기회로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명·왜 교섭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음력 1월(이하 날짜는 음력)에 14만 병력으로 재침략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1596년 겨울,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재 침략에 앞서 걸림돌인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부하인 요시라를 시켜 조선 조정에 허위 정보를 흘린다. "정적인 가토 기요마사가 1957년 1월 대마도에서 부산포로 향하니 맞서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선조는 이를 믿고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하지만 적의 간계임을 알고 장군은 출동하지 않았다. 이를 괘씸히 여긴 선조는 왕명 거역 죄로 2월 26일 장군을 파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해, 투옥시킨다. (‘쉽게 보는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후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부산 앞바다로 나가 왜군과 싸우라는 도원수 권율의 독촉에, 휘하 정예 함대 160여척과 수군 1만5천여명을 이끌고 나가 싸운다. 그러나 전략 없는 싸움으로 칠천량까지 후퇴하여 궤멸하고 말았다.
칠천량해전공원은 이 비극적인 전쟁을 한눈에 보고 느낄 수 있도록 7개의 테마로 구성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임진왜란 당시 수군과 백성의 생활상이나 전함의 구조 등이 잘 재현되어 있다. 또한 7~8분 정도 상영되는 영상물을 통해 1만여명의 조선 수군이 희생된 칠천량해전의 슬픈 역사를 사실감 있게 그려냈다.
칠천량의 패배를 '명량의 승리'로...이순신의 귀환
한양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우의정 정탁(鄭琢)의 간절한 상소로 목숨을 건진 이순신은 1597넌 4월 1일 감옥에서 나와,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진영으로 ‘백의종군’을 시작한다. 장군은 7월 18일 경남 합천에서 칠천량해전의 대패 소식을 듣는다. 난중일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고 하였다. 듣자 하니, 통곡을 금할 길이 없었다.“ (‘쉽게 보는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必生則死)”-. 8월 16일 전투는 아침부터 치열하게 전개됐다. 칠천량의 망령에 시달렸던 조선 수군은 왜군 133척을 물리치고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승리를 일궈낸다. 장군은 난중일기에 “이번 일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고 적었다.
아픔을 딛고 관광명소로 발돋움하는 칠천도
칠천도(七川島)는 경남 거제시의 북서쪽에 있는 섬으로, 섬에 강이 7개가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면적은 9.87㎢, 해안선의 길이 25 km에 이른다.
거제시에 속한 10개의 유인도 중 가장 큰 섬으로 2024년 2월 현재 626세대에 1018명이 거주하고 있다. 옥녀봉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으며 승용차나 자전거로 섬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또한 부속 섬인 황덕도와 수야방도는 인도교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40~60분의 코스로 누구나 트레킹하기에 좋은 수야방도 정상에 오르면 시원스레 펼쳐지는 마산만과 거가대교, 부산 가덕도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칠천도 일대의 섬과 해안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칠천량 해전길’도 있다. 칠천량해전공원~옥녀봉~대곡고개~굿동산~옆개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5.4km의 코스로 3시간 30여분 소요된다.
거제시는 관광자원 개발 차원에서 해전공원 아래 옥계마을 선착장과 무인도인 씨롱섬 사이에 길이 200m, 너비 2m의 출렁다리 설치공사를 마무리 중이다. 씨릉섬은 출렁다리 개통으로 올리브를 주제로 한 테마섬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장문포왜성과 장목진객사 등 임진왜란 유적지도 가볼 만
칠천도를 둘러봤다면 그곳에서 가까운 거리의 장문포왜성(場門浦倭城)도 가볼 만하다. 선조 27년(1594) 장목만 서쪽 산 정상부에 축조된 이 왜성은, 바다 건너 500여m 맞은편에 축조한 송진포왜성과 함께 장목만을 수비하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쌓았다. 남아있는 성벽의 둘레는 710m, 높이 3.5m, 너비 3.5m이다.
난중일기는 장문포왜성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안에는 높은 누각이 있으며, 양쪽 산봉에 성채를 쌓고 싸우려 하지 않는다”. 선조는 한산대첩에서 승리한 이후 장군이 왜군과 싸움에 소극적이라며 불만을 갖게 되는데 바로 장문포해전이 그 시작점이었다고 한다.
장문포왜성을 나와 장목항으로 가다가 장목마을로 들어서면, 조선 수군의 자취가 서린 장목진객사와 만날 수 있다. 거제 장목진 객사는 정면 4칸과 측면 2칸의 건물로 조선시대 거제부에 소속된 7진 가운데 하나였던 장목진 관아의 부속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하던 거제 7진 가운데 남아있는 유일한 목조 건축물로,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장문포왜성과 장목진객사는 임란 당시 거제도가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공동경비 지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양진형 기자 news@kislan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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