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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이자 '사씨남정기'의 산실...남해 노도

양진형 기자 | 기사입력 2022/06/20 [07:36]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이자 '사씨남정기'의 산실...남해 노도

양진형 기자 | 입력 : 2022/06/20 [07:36]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선착장 가는 길에 바라본 노도


유배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특히 흔했다. 조선 시대 5대 형벌 가운데 유배형은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지만 유배자가 유배지에서 겪게 되는 삶의 양식은 사람마다 달랐다.

 

사대부들에게 유배는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아픔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살면서 흔히 가질 수 없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 기회를 잘 살린 이들은 유배지에서 다양한 시문을 남겼고 그것은 유배문학이라는 튼튼한 하나의 장르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 유배자들이 남긴 유배문학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40세에 시작되어 57세까지 이어진 유배 생활이 그의 인생에서 저술기로 평가받고 있다. 전남 강진군의 유배지에서 유배 기간 600여 권의 저서들을 세상에 남겼다.

 

몇 해 전 영화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진 ‘자산어보’는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를 간 후 그곳에서 갖가지 해산물을 연구하여 집대성한 뛰어난 어보(魚譜)이다.

 

또 ‘매화에 미친 화가’로 알려진 조희룡은 신안 임자도에서 18개월 남짓한 유배 기간 동안 그의 대표작 대부분을 그렸다고 한다. 조희룡은 임자도 유배라는 특별한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예술적 완성으로 나아간 것이다.

 

조선 후기 대표적 서화가인 원교 이광사는 진도를 거쳐 완도 신지도로 이배 되어 15년을 보내다 생을 마쳤다. 이광사는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한국적인 서체의 모태가 된 ‘동국진체’와 서예의 체계적인 이론서인 ‘서결’을 완성했다.

 

남해읍 남해유배문학관 앞 서포 김만중 동상


서포 김만중(1637∼1692)은 절해고도인 남해군 노도로 유배되어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집필했다. 구운몽은 남해가 아닌 압록강의 지척인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명문가 출신의 김만중, 장희빈 아들 세자책봉 반대하다 남해로 위리안치

 

광산 김씨인 김만중의 집안 내력은 화려하다. 그의 증조부가 김장생(1548~1631)이고, 큰할아버지가 김집(1574~1656)이다. 부자 모두 조선의 기틀을 닦은 대 성리학자로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인조의 가족들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사수하다가 순절하고 만다. 김만중은 피난민들을 태우고 강화도에서 출항한 배 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배 위에서 태어났다’ 하여 어릴 적 이름이 선생(船生)이었다고 한다.

 

가학(家學)으로 학식을 겸비한 어머니 윤씨 부인은 궁색한 살림에도 김만기, 김만중 두 형제에게 필요한 서책을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구입했으며, 이웃에 사는 홍문관 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했다 한다.

 

노도 김만중문학관 벽화.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구운몽도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로움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의 이러한 훈도 덕분에 14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그 뒤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1686년(숙종 12)에는 대제학에 오른다. 그러나 정치적 고초를 겪으면서 세 번의 유배길에 오르는데 두 번이 장희빈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 사건과 연루된 것이었다.

 

압록강 인근 선천으로 두 번째로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해배되었으나, 다시 희빈 장씨 아들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남인 세력에 숙청당해 남해에 위리안치되기에 이른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했던 가문의 숙명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형 김만기의 딸이 숙종 첫째 부인인 인경왕후였는데 불행하게도 그녀는 20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하고 만다.

 

서포가 남해에 위리안치되자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효성이 지극했던 서포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유배 생활 3년 2개월 만에 눈을 감으니 그의 나이 56세였다.

 

노도에서 만나는 대문호 김만중의 발자취 '허묘'와 '샘터'

 

벽련선착장


노도는 배를 젓는 노를 많이 생산했다고 하여 ‘노도(櫓島)’라 불린다고 한다. 노는 상수리나무로 만들었는데 노도에는 이 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또한 섬의 생김새가 삿갓을 닮아 ‘삿갓섬’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 국립공원 한려해상공원에 속한 노도는 남해의 명산인 금산과 호구산, 설흘산 등에 둘러싸인 앵강만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선착장에서 직선거리로 1km 남짓 떨어져 있으며 면적 0.41㎢, 해안선은 3km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현재는 13가구가 살고 있다.

 

노도 가는 도선


남해군은 김만중의 유적과 이야기를 엮어 노도를 '문학의 섬'으로 조성했다. 2011년부터 노도에 150억원을 투자해 서포문학관, 민속체험관, 작가창작실, 서포 초옥, 야외전시장 등을 조성했다. 노도는 소설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대문호 김만중의 유배지로 차츰 알려지면서 관광객의 출입이 늘고 있다.

 

노도선착장의 조형물. 왼쪽은 구운몽의 일부를, 오른쪽은 김만중 조형물과 앵무새 부조가 있다


20여명 남짓한 탐방객들을 실은 도선이 노도 선착장에 도착하자 ‘서포의 책’ 조형물이 방문객을 반겨준다. 조형물 왼쪽은 ‘구운몽’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 오른쪽은 김만중 조형물과 앵무새의 부조가 있다. 조형물 아래쪽에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적혔있다. '서포만필'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노도마을


섬이 작아 변변한 식당이나 펜션도 없고, 섬 주민들도 별다른 욕심이 없어 보인다. 가파른 길을 오르고 있는 노도마을 할머니(76)에게 물으니 주민 대부분은 밭에 나가 쉬엄쉬엄 콩이나 깨, 고구마 등 밭농사에 치중하고 있으며 남성의 활동이 왕성한 2가구는 통발을 활용해 문어잡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일을 많이 해 지금은 허리가 굽었지만 젊었을 때는 꽤 미인이었다”며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수국과 치자꽃으로 둘러싸인 '구운몽원'과 '사씨남정기원'

 

마을 어르신들이 앵강만 바다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노도 트레킹은 마을 중간쯤에 있는 노도문학관에서부터 시작된다. 호수처럼 잔잔한 앵강만과 그 뒤 호구산을 바라보고 있는 문학관에는 노도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이 있고, 그 아래에는 실제 사용된듯한 ‘노’가 전시되어 있다.

 

노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담긴 노도문학관. 아래는 배를 젓는 데 사용되던 노가 전시돼 있다


문학관 뒤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 800여m 정도를 가면 ‘김만중 허묘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오르막을 따라 300여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허묘다. 김만중이 죽은 뒤 이곳에서 5개월 정도 머물다가 충남 논산으로, 이어 경기도 대덕산(형 김만기의 묘 아래) 기슭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허묘. 김만중의 시신은 이곳에서 5개월 정도 안치되었다가 충남 논산으로 옮겨간다


풀이 나지 않는 공터 가운데 원형의 작은 돌무더기가 있다. 다시 원점 회귀하여 300여m 정도 직진하면 말끔하게 잘 지어진 '김만중 문학관‘이 나온다. 당초 그가 거처했던 초옥이 있던 자리로, 사씨남정기를 썼던 산실이다.

 

김만중 문학관. 유배 당시 서포 초옥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사씨남정기를 집필했다


문학관 1층에서는 ‘김만중의 일대기’를 기리는 5분 분량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2층은 김만중 가문의 연보와 그의 어록, 밀랍 인형으로 만든 당시 생활상 등이 재현돼 있다. 이곳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서포는 처음에 남해 본도로 유배됐으나 염탐꾼들이 지켜보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자청하여 노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김만중이 팠다는 샘터. 마르지 않는 우물에는 도둑게들이 살고 있다


문학관에서 가파른 길로 100여m 올라가면 서포 초옥이 있고, 임도를 따라 더 올라가면 ‘노도 생태숲’이 나온다. 생태숲 아래쪽엔 ‘구운몽원’이, 그 위쪽 능선을 따라가면서 ‘사씨남정기원’이 조성돼 있다.

 

구운몽원과 사씨남정기원 오르는 길


두 정원 모두 주인공과 그에 얽힌 주요 스토리들을 동상으로 형상화해 놓았다. 정원에 심어진 목수국과 치자꽃이 한려수도를 달려온 해풍과 어우러져 묘한 향내를 풍긴다. 그 향내는 이내 전두엽을 자극해 조선 시대 두 소설의 공간으로 빨려 들게 만든다.

 

세월의 간극을 넘어 발아하고 있는 김만중이 뿌린 문학의 씨앗

 

구운몽원의 양소유


‘사씨남정기원’의 끝 지점에 ‘그리움의 언덕’이라는 전망대가 있다. 꽤 가파른 언덕배기를 올라왔으므로, 이곳 전망대에서 한숨을 돌리며 조망을 살핀다. 왼쪽에는 금산의 남쪽 자락이 바다로 자맥질해 있고, 가운데로는 한려수도의 푸른 바다, 여수 돌산반도와 금오도, 소리도 등이 진을 치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갖은 고초를 겪은 후 다시 재회한 사씨 일가족


전망대에서 원점 회귀하여 노도 선착장까지 가는 방법이 있으나, 산을 가로지르는 방법을 택한다. 산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 진행하니, 노도 선착장으로 연결된 임도가 나온다. 이곳에서 선착장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언덕 위에 예쁜 펜션처럼 보이는 건물 서너 동이 보인다. 노도 작가창작실이다.

 

전망대에서 노도창작실로 넘어오면서 바라본 풍경. 멀리 좌측으로 여수 돌산반도가, 가운데 설흘산 자락에는 가천다랭이마을이 위치해 있다


남해군은 공개 모집을 통해 이곳 노도창작실에 입주할 작가들을 선정하고 있다. 대상은 전국의 기성·신진 작가들로 시(시조), 소설, 수필, 희곡, 번역, 평론 등을 망라한다. 선정된 문학인들은 입주 시점부터 3개월간 머물며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고 한다.

 

노도창작실


입주작가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앵강만 바다와 서포의 숨결이 스며있는 이곳 작가창작실에서 사씨남정기에 버금가는 작품 한 편 남기려고 창작열을 불태울 것이다. 서포는 정치적으로 만년이 불우했지만 그가 뿌린 문학의 싹은 죽지 않고 세월의 간극을 넘어 이제부터 발아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남해 독일마을


노도 트레킹은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따라서 가천 다랭이마을이나, 금산 보리암, 설리스카이워크, 독일마을 및 물건리 방조어부림 등 남해 핫플레이스와 연계하여 여행하면 좋을 것 같다.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천연기념물 제150호). 길이 750m, 너비 40m 내외로 17세기 바닷물이 넘치는 것을 막고 물고기가 살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낙엽활엽수인 팽나무, 푸조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다


 

1. 위 치

    o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2. 가는 방법

    o 남해 상주면 벽련선착장

     - 벽련→노도 : 07:30, 10:30, 14:30(동절기)

                        07:30, 10:30, 15:30(하절기)

     - 노도→벽련 : 08:40, 13:30, 15:30(동절기)

                        08:40, 13:00, 16:30(하절기)

       ☎ 문의 : 010-4045-2720 (휴항일 : 둘째, 넷째 수요일)

 

3. 섬에서 즐기기 : 트레킹

     o 트레킹 코스(3.8km/2시간 30분)

      : 노도선착장→노도문학관→김만중 허묘→김만중문학관→서포초옥→구운몽원→생태연못 →

       사씨남정기원→전망정자(그리움의언덕)→작가창작실→노도문학관→노도선착장

 

4. 추천사이트 : 남해군 홈페이지 : https://www.namhae.go.kr/tour/00007/00015/00074.web?amode=view&idx=16

                                           남해군 문화관광 : https://www.namhae.go.kr/tour/main.web

                                           대한민국 구석구석 : https://me2.do/xtHVJSFk

 

노도 종합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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